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레리아 메살리나 (문단 편집) == 평가 == [[파일:Hans_Makart_Messalina.jpg|width=100%]] 로마의 역대 아우구스타 중 [[소 아그리피나]], [[소 파우스티나]]와 더불어 아우구스타 직위를 가진 로마인 중 고대부터 현대까지 그 평가가 최악일 정도로 안 좋다. 어느 정도로 최악인지, 함께 꼽힌 소 아그리피나와 소 파우스티나 외의 다른 로마 황제들(특히 사촌동생 네로)와 비교해도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그 평가가 1, 2위를 다투고 있다. 동급으로 묶여 비난받은 두 아우구스타와 달리 메살리나는 "탐욕스럽고, 비열하고 잔인하며 비양심적이고 몰상식했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일관된 의견인데, 메살리나는 소 아그리피나가 가진 비열함과 권력에 대한 집착과 소 파우스티나가 사후 악명을 얻게 된 길거리 내 뜬소문을 실제 했던 것 때문에 여타 로마인들에게 그 평가가 최악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로마 제국의 역대 아우구스타 중 기록말살형을 받은 첫 아우구스타인 까닭에 그 악명은 그녀가 죽고 2000년 가까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안 좋다. 그래서 현대의 여성 고대 사학자 칼리 실버의 경우,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하고 싶지 않은 다섯 명의 로마 아우구스타" 중 그녀를 1, 2위를 오가는 최악의 아우구스타로 언급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악행들과 몰락은 당대 기록은 물론이고,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카시우스 디오]], [[수에토니우스]] 등 후세 로마 역사가들의 저작에 실려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대에 와서 그녀에 대한 기록을 그대로 믿지 말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당대 역사가들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의도적으로 비방한 점이 많은 것은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 [[네로]] 모두의 시대에서 꾸준히 확인되는데다 메살리나의 악행 중 유명한 사건이었던 율리아 모자 반역죄 사건이나 아시아티쿠스 반역 사건은 분명 악행이 아닌 명백한 모반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가 탐욕스러웠고 구제불능의 음탕한 황후라는 주장에 대해 메살리나의 만행이 부풀려졌다는 가설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의견은 갈수록 설득력을 얻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 때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근래에 교차검증으로 재평가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라는 말로 사치와 향락의 결정체로 여겨졌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제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도박을 좋아하긴 했으나 당대 프랑스 귀족 기준 검소하고 사려깊은 성품에, 편애가 심했던 자신의 [[마리아 테레지아|어머니]]와 달리 자애로운 어머니었으며[* 첫 아이를 낳고 패가망신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못 고친다는 [[도박 중독]]에서 벗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모범적인 왕족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평가가 이루어진 지금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향락의 이미지가 강하다. 앙투아네트가 기록도 풍부하고 교차검증이 쉬운 200년 전 [[근대]] 인물인 것을 생각하면 2000년 전 [[고대]]인이었던 메살리나의 악행은 더욱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황족 여성에 대한 성적인 루머는 특히 그렇다. 로마가 성적으로 문란한 사회였다고 해도 황후가 매춘을 대놓고 할만큼 막장이지는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사생아가 있었을텐데 기록에 남은 메살리나의 자녀는 둘 뿐이다. 몇 세기 이후의 인물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불륜]], [[동성애]], [[수간]], 심지어 7살인 [[루이 17세|아들]]과의 [[근친상간]]같은 온갖 헛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아들과의 근친상간 혐의는 민중 재판에 어거지로 기소되었다. 재판 당시 앙투아네트는 국고 낭비, 모반, 오스트리아와의 내통을 비롯한 다른 혐의들 대해서는 담담히 듣고만 있었으나, 아들과의 근친상간에 대한 혐의를 듣고는 매우 황당해하며 '''"여기 계신 어머니들, 이게 말이 됩니까"'''라고 항변했고 방금 전까지 앙투아네트를 비난하던 방청석의 여인들마저 동감했다고 한다. 여제인 [[예카테리나 2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또한 당대부터 음담패설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물론 음란함은 거짓이라 보더라도, 황후가 불륜남과 사람들 앞에서 결혼식까지 하고 황제를 쫒아내려 한것은 부정되지 않기 때문에 평가가 그닥 달라지지는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